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1972년 재임에 성공한 공화당의 대통령입니다. 중국과 외교 관계를 트는 등 눈에 띄는 업적으로 인기 많았던 지도자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를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사임한 대통령으로 기억합니다. 채 상병 특검에 대통령 거부권이 행사되고 난 뒤 야당이 탄핵까지 벼르면서 닉슨 사례가 자주 언급됩니다. 워터게이트는 어떤 사건이고, 닉슨은 왜 사임하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공화당은 왜 민주당을 도청했나
1972년 대선을 앞두고 닉슨 재선을 위해 움직이던 백악관과 공화당의 닉슨 재선위원회는 닉슨을 위협할만한 후보를 민주당의 내분을 이용해 쳐내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위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워싱턴D.C. 워터게이트에 있는 민주당전국위원회(DNC) 건물에 도청 장치를 설치합니다. 그런데 당시 설치한 도청 장치 중 민주당 전당대회 의장실 전화기에 설치한 도청기가 고장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6월 17일 오후 쿠바인 망명자 6인조에게 DNC 사무실에 침투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건물 경비의 눈에 띄었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를 특종 보도하며 정치적 배경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 기자가 그 유명한 워싱턴포스트의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였습니다. 이들은 이후로도 관련 특종 보도를 이어가서 닉슨을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닉슨은 뒤늦게 자신도 알지 못한 공작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이 보도가 확산돼 11월 대선에 방해 되지 않도록 사건을 은폐하라는 지시도 내렸습니다. 이어지는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고민하던 닉슨은 정보의 출처가 FBI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CIA에 국가안보가 걸린 문제라며 FBI의 이 사건 수사를 방해하라고 지시합니다. 하지만 당시 CIA 국장은 이미 국민적 관심사가 된 사건이기 때문에 부담스럽다며 이 지시를 거절했습니다.
닉슨, 특검 해체로 탄핵 여론 촉발
법정에 선 쿠바 망명조 6인은 당시 판사의 법정최고형량인 40년 선고에 깜짝 놀라며 형량을 줄이기 위해 공화당이 배후라는 사실을 술술 털어놓게 됩니다. 1973년으로 해가 바뀌면서 사건은 드디어 정치 문제로 비화했고 상원에서 이를 독자적으로 조사하기로 합니다. 5월 청문회를 앞두고 이 사건을 수사할 특별검사를 선임해야 하는데 당시 법무장관이 추천한 몇 사람 중에는 장관의 은사였던 민주당 성향의 로스쿨 교수 아치볼드 콕스도 들어 있었습니다. 특검을 정하는 상원은 민주당이 우세했기 때문에 콕스가 특검으로 낙점되었습니다.
당시 닉슨은 특검 출범을 환영한다고 했지만 속으로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10월에 대통령 권한을 이용해 특검팀 해산이라는 무리수를 둡니다. 특검 수사 과정에서 존재 여부가 확인된 백악관 내 대화 녹음 자료도 국가안보에 해가 될 수 있다며 제출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 대화 내용이 공개되면 닉슨이 도청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사건이 불거진 이후 그가 어떻게 대응했는지가 모두 드러날 판이었으니 그럴만도 합니다.
그러나 닉슨의 이런 계획은 부하들의 반대로 물거품이 됩니다. 특검 해임을 해야 하는 법무장관은 닉슨의 지시를 거부하고 장관에서 물러나 버립니다. 닉슨은 이어 장관 대리가 된 차관에게 해임하라고 또 명령하지만 차관도 거부하고 사퇴합니다. 그 다음으로 장관 대리를 맡은 송무차관은 고민 끝에 특검팀을 해체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사건을 '토요일밤의 대학살'이라고 했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대통령 탄핵으로 단번에 몰고 간 것은 바로 이 대통령의 사법 방해였습니다.
워터게이트 위증 드러나 결정타
특검 해체 전인 1973년 6월까지만 하더라도 갤럽 여론조사에서 닉슨 탄핵 여론은 19%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토요일밤의 대학살' 직후 NBC 여론조사에서 탄핵 찬성 44%, 반대 43%로 처음 탄핵 여론이 우세하게 됩니다. 여론에 데여 다시 새로운 특검을 출범시키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습니다. 탄핵 분위기가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탄핵 청문회는 1974년 5월 하원 법사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대통령 탄핵의 최종 결정권을 쥔 상원에서 탄핵 찬성 의원은 탄핵을 가결시킬 숫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백악관 녹음 테이프 제출 거부는 결국 연방대법원에까지 올라갔고 닉슨은 이 재판에서 이겨 여론을 조금이라도 되돌리고 탄핵을 무산시킬 계획을 짰습니다.
연방대법원 심리에서 닉슨은 국가 기밀이 들어있는 테이프를 제출하지 않을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합니다. "미국 대통령은 재임 중에는 루이 14세와 같은 강력한 권한을 갖는다. 이는 미국 대통령이 탄핵 심판을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법정의 명령에도 굴복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대통령 면책특권은 법원의 판단에도 구애받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보인 것입니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은 닉슨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의 직무상 의사소통이 기밀로 유지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에 국한되는 반면, 형사 소송에서 관련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 헌법적인 필요성은 특정한 형사 재판의 공정한 판결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로 분류할 수 없는 예외적 경우에 해당된다. 의사소통의 기밀성에 대한 대통령의 특권은 그러한 예외적인 형사 사건으로 인하여 일부 대화가 공개된다고 해서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닉슨이 임명한 대법관이 3명이나 있었던 연방대법원은 만장일치로 닉슨에 백악관 녹음 테이프의 법정 제출을 명령했습니다.
테이프에 담긴 닉슨의 발언은 법정에서 공개되어 그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사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국민을 향해 거짓말을 했고, 무엇보다 법정에서 위증을 했습니다. 하원 위원회에서 탄핵을 본회의에 상정해야 한다는 안이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습니다. 탄핵이 초읽기에 들어갔습니다.
보다 못한 공화당 의원 일부는 의회가 대통령을 탄핵하는 정도로 행정부에 간섭하는 선례를 남기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해 닉슨에게 탄핵 가결 전 사퇴해주도록 요청했습니다. 닉슨이 이를 거부하자 이번에는 공화당 상원 지도부가 백악관을 방문해 사퇴를 설득했습니다. 그날 저녁 닉슨은 딸 부부와 식사를 같이 했는데 그 자리에서 딸 부부에게서까지 사퇴가 낫겠다는 조언을 듣고 고집을 꺾었다고 합니다.
결국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약 2년 2개월만에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탄핵 궁지에 몰린 채로 사임을 발표합니다. 대통령은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승계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 직권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닉슨의 모든 혐의를 사면해 인기를 잃고 맙니다. 이어진 1976년 대선에서 지미 카터가 당선돼 민주당이 8년만에 정권을 교체했습니다.
**두 줄 정리
1. 닉슨의 특검 해체(사법 방해)가 민심의 이반을 부추겼다.
2. 닉슨의 거짓말이 법정에서 드러나면서 공화당의 이반을 불렀다.
결국, 사법 방해와 거짓말이 탄핵을 결정짓는 두 가지 키워드입니다. 채 상병 수사 외압 사태의 경우 사법 방해는 특검 거부권 행사로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거짓말이 드러날까요. 그럼 어떻게 될까요.